최근 미디어오늘에 눈길을 끄는 기사가 하나 실렸다. 3월29일자 “정치 심의 바꾸겠다던 민주당 어디로 갔나” 로 지난 20대 총선 이후 민주당의 언론과 미디어 관련 공약 이행을 점검한 기사다. 22개의 공약 이행을 살펴본 결과, 해직 언론인 복직, 종편 특혜 철회 등 일부 이행된 공약은 있었지만 완전히 이행된 공약은 하나도 없었다. [ 관련기사 : 정치 심의 바꾸겠다던 민주당 어디로 갔나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정책 선거보다는 정권을 평가하는 정권 선거가 아닌 적은 없었다. 그러나 정권을 심판한다 해서 약속한 정책과 법안을 추진하
3월 말로 가고 있는 지금, 대학이 보이지 않는다. 대학은 건물이 아니다. 학생, 교직원 뿐 아니라 인근 지역주민까지 사람과 사람의 대화와 교류가 오가는 공간이 대학이라면 2020년 3월. 대학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보이지만 않을 뿐 ‘온라인 비대면 강의’라는 이름으로 대학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공간에서 전에 없던 경험을 하고 있다.교육부 권고로 연기된 대학 개강은 각종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을 이용한 화상 강의로 대체되어 진행 중이다. 하지만 기본적인 인프라를 갖추지 못한 대학 당국, 동영상 제작 및 운영에 서투른 교
지난 3월6일, 내가 살고 있는 서울시 동대문구의 한 공동체가 현수막을 걸었다. 여성의 날을 며칠 앞두고 투표를 독려하는 프레이즈가 걸린 현수막이었다. “3.8 여성의 날. 나는 성평등에 투표합니다”라는 문장 한 줄 이었다. 그런데 하루가 되기도 전에 현수막이 사라졌다. 사정을 물어보니 해당 지역 선거관리위원회가 그 현수막 게시를 선거법 위반으로 통보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선관위는 단체에 자진 철거 요청과 함께 미철거시 선거법 위반 행위에 대한 조사와 강제 철거를 진행할 수 있다고 알려왔다.
이 글을 쓰는 2월 24일. 오후 4시 현재 코로나19 확진환자는 833명이며 사망자는 7명에 이르렀다. 현재 검사가 진행 중인 유증상자만 해도 11,631명에 달한다. 정부가 위기 경보를 가장 높은 수준인 ‘심각’ 단계로 올렸지만 시민들은 아침마다 확인하는 확진환자의 숫자만으로도 이미 심각의 상태를 넘어섰다.예상할 수 없었던 확진환자 수의 증가는 연령, 지역, 직업, 소득 수준 등을 가리지 않고 전파되는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의 무차별성을 보여준다. 감염증이 두려운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나 또한 예외일 수 없다는 두려움과 불안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뉴올리언스를 강타했다. 카트리나는 비록 자연재난이었지만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태롭게 만든 요인은 따로 있었다.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보도 참사와 공권력 남용이 그것이었다. 뉴올리언스 이재민 6만명 이상이 대피한 슈퍼돔은 말 그대로 고립무원이었다. 전기는 끊겼고 물공급과 환기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취재 접근조차 힘든 슈퍼돔 내부의 상황을 폭력과 범죄의 현장으로 보도한 언론들이었다. 슈퍼돔만이 아니었다. 폐허가 된 지역에서 약탈, 총격전, 방화, 강간 등이 자행되고 있으
4월15일에 실시될 총선 시계가 이제는 분침 단위로 똑딱이고 있다. 며칠 전 내가 사는 몇몇 동네 지인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번 총선에서는 지역에서 준비하는 활동은 없나요?” 한 분의 대답이 뒤통수를 때렸다. “글쎄, 뭐가 달라지겠어? 똑같지 뭐.” 지인들의 “똑같다”는 대답은 그냥 흘려들을 말이 아니었다. 앞으로 80일 정도 남은 시간 동안 벌어질 일이 이전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다.우선 선거운동 기간 동안 이슈가 만들어지는 방식이다. 선거법에 따른 정당 광고, 정책 토론 등을 편성할 방송 뿐 아니라 다양한 매체들
쟁점을 다루는 토론회는 결코 쉽지 않다. 오래된 과제이며 해법조차 찾기 쉽지 않은 쟁점일 수록 더욱 그렇다. 1월 1일 가 다룬 언론개혁은 그 자체로 언론개혁의 어려움을 보여준 토론이었다.잘못끼운 첫 단추언론개혁이라는 의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정확한 쟁점의 선정이 필요했다. 출입처 중심의 취재 관행, 피의사실 공표, 속보와 단독 보도 경쟁, 포털이나 유튜브와 같은 플랫폼의 문제, 중앙 언론 중심의 정치 보도 뿐이 아니다. 여기에는 보도국의 조직문화나 갈수록 악화되는 수익성 등
돈을 받은 이에 대한 비난과 비판은 거세지만 돈을 준 이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다. 돈을 준 당사자도 마찬가지다. 지난 12월 13일자 경향신문 1면과 22면에 게재되려다 삭제된 기사의 이야기다. 미디어오늘 보도에 따르면 해당 기사의 삭제 요청과 대가 제의는 프랜차이즈 파리바게뜨를 운영하고 있는 SPC그룹에서 나왔다고 한다. 비록 경향신문 기자협회의 성명과 자사의 기사로 공개 사과가 이뤄졌고 후속 조치가 취해지고 있다고 하지만 이 사건을 보는 독자들의 시선은 결코 곱지 않다. 유력 중앙일간지, 그것도 진보를 표방하는 언론사가 어떻게
기자라는 직종을 비하하는 욕인 ‘기레기’는 세월호 참사 이후 널리 쓰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전에도 이 말은 별 차이 없는 속보 경쟁, 짜깁기 기사 양산, 선정적 제목 달기 등 질 낮은 기사를 양산하는 기자들을 향한 비난으로 쓰였다. 세월호 참사 이후 이 욕설이 더 많은 기자들을 향한 이유는 질 낮은 기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해 말 방송기자연합회는 참사 현장에 있었던 기자들의 회고와 반성을 담은 보고서 을 내놓았다. 여기서 기자들이 고백한 보도 참사는 ‘사실 확인 부족·받아쓰기 보도’, ‘비윤리적·
그것은 1335개의 묘비명이었다. 11월 21일 경향신문 1면을 보았을 때, 눈을 몇 차례 비볐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은 1호선 지하철역 신문 가판대가 아니라 거대한 공동묘지에 끝도 없이 늘어선 묘비들의 사잇길 같았기 때문이다. 익명의 성씨와 나이, 다섯 가지로 분류된 사고원인이 빼곡히 채워진 묘비들 사이로 “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했다”라는 조사(弔辭)만이 읽혔다. 퇴근이란 말조차 어울리지 않았다. 세상이란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때만 존재한다면 “오늘도 세상이 세 번 사라졌다”고 해야 맞다. 공포와 두려움이 밀려왔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해야겠다. 내세울 것 없는 현장 경력과 연구 실적에도 종종 기자들 전화를 받는다. 갑자기 불거진 미디어정책 관련 이슈나 저널리즘, 미디어 현장의 노동에 관련된 의견을 묻는 전화다. 기자들의 모든 질문에 준비한 답변이 있거나 오랫동안 고민해 온 연구 주제가 아니니 정중히 거절하는 일도 많다. 그럼에도 마감에 쫓기거나 다른 인터뷰이를 구하지 못했다는 기자의 사정 때문에 쏟아낸 설익은 답변을 이후 기사로 읽으면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다. 기자가 전화로 의견을 묻는 때는 두 경우다. 하나는 기사에 필요한 짧은 멘트가
어느덧 ‘가짜뉴스’는 뉴스의 형식을 갖춘 명백한 허위조작 정보부터 자신과 다른 해석을 내리는 의견까지 뭉뚱그려 가리키는 자의적 표현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가짜뉴스를 단지 의도적 거짓말이라는 내용, 또는 독자 대다수가 오인할 수 있는 뉴스보도의 형식을 갖춘 조작된 정보로 좁힐 수는 없다. 가짜뉴스의 원조인 양치기 소년의 “늑대가 나타났다”는 외침은 마을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 외침이 더 이상 마을 사람들을 속이지 못 할 때, 양치기 소년의 외침은 가짜뉴스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가짜뉴스의 규정은 그 내용이나 형식이 아니라 효과에 있을지 모른다. 가짜뉴스의 유형을 구분하고 공통의 속성을 찾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런 점에서 최근 한 언론사의 몇몇 기사들은 제법 훌륭한 매뉴얼을 보여주고 있다.